옴니휴먼의 시대 — 한 우물을 판 사람보다 많이 해본 사람

AI가 실행을 대신하면서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그 판단의 재료는 경험이다. 애매하다고 여겨지던 여러 업종의 경력이 AI를 만나 문제를 발견하고 빠르게 시험하는 힘이 되는 이유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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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와 계산기, 바코드 스캐너, 화분이 놓인 작업대 앞에서 생각에 잠긴 사람

오래 한 사람에서, 많이 겪은 사람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을 전문가라고 불렀다. 한 회사에서 20년, 한 직종에서 30년. 그 숫자 자체가 성실함이자 전문성의 증거였다.

반대로 직장을 여러 번 옮겼거나 전혀 다른 업종을 오간 사람에게는 다른 시선이 붙었다. 한 가지를 제대로 못해서 계속 옮기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AI가 등장하면서 이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AI를 만났을 때 훨씬 강한 경쟁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을 옴니휴먼(Omni-Human)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살아본 세대

옴니휴먼을 이야기할 때 흥미로운 세대가 있다. 1970~80년대에 태어난 세대다.

이 세대는 어린 시절 스마트폰이 없었다. 집에 전화기가 한 대뿐인 경우도 흔했고, 타자기와 종이 문서, 우편, 지도책과 전화번호부가 실제 업무 도구였다.

그러다 PC가 등장했다. 글자 명령으로 쓰던 DOS를 지나 윈도우가 왔고,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이메일과 검색엔진, 휴대전화를 지나 스마트폰, 모바일 결제, 클라우드, SNS, 그리고 이제 생성형 AI까지 왔다.

불과 수십 년 동안 한 사람이 아날로그에서 PC로, 인터넷으로, 모바일로, 클라우드로, AI로 이어지는 변화를 전부 직접 겪은 것이다. 중요한 건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변화 속에서 계속 일을 했고, 문제를 풀었고, 새 도구에 매번 적응했다는 것이다.

도구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본 경험 자체가 꽤 독특한 자산이다.

애매한 경력, 질문이 바뀐다

옴니휴먼의 또 다른 특징은 직업 경험이다.

창고에서 일해봤고 택배 업무도 해봤고 영업도 해봤다. 쇼핑몰을 운영해봤고 프로그램 개발에도 참여했다. 수출 업무도 해봤고 포워딩도 조금 안다.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애매한 경력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전문 분야가 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

AI 시대에는 질문이 달라진다. 이 사람이 가진 경험들을 AI와 연결하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여기서 옴니휴먼의 경쟁력이 생긴다.

AI는 코드를 쓴다. 문서를 만들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미지를 읽고, 번역하고,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하지만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사람이 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발견하는 능력은 상당 부분 경험에서 나온다.

AI가 바꾼 것, 실행과 검증 비용

과거에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행이 어려웠다.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개발자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이너가 필요했다. 데이터를 분석하려면 분석가가, 해외 자료를 뒤지려면 외국어 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경험 많은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로 만들어보는 데 큰돈과 긴 시간이 들었다. 혼자서 완성품을 다 만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아이디어를 시험해보는 비용이 극단적으로 낮아졌다.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싶으면 몇 시간 만에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본다. 이 데이터를 이렇게 분석하면 어떨까 싶으면 직접 돌려본다. 카메라로 제품을 찍어서 불량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으면 방법을 조사하고 간단한 실험까지 해본다.

예전에는 1,000만 원이 필요했던 검증이 100만 원이 되고, 100만 원이 필요했던 검증이 몇만 원이나 몇 시간의 작업으로 끝나는 경우가 생긴다. 실패 비용이 낮아지면 판이 바뀐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보다 많이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해진다.

지식은 이제 AI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무엇과 무엇을 붙여볼지는 겪어본 사람이 더 잘 떠올린다.

시니어, 현장 사람만 아는 질문들

그래서 시니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시니어의 약점으로 흔히 지적되는 건 새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다. 하지만 새 기술을 받아들인 시니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20~30년 동안 산업현장에서 일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문제가 저장되어 있다. 저 작업은 왜 항상 두 번 하지. 왜 아직도 저걸 엑셀로 관리하지. 저 과정에서 사고가 왜 그렇게 나지. 저 서류는 왜 매번 사람이 쓰지.

젊은 개발자는 AI를 잘 써도 그 문제 자체를 모를 수 있다. 반대로 현장을 오래 겪은 사람은 문제를 알고 있었다. 해결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이제 그 사이에 AI가 들어온다. 현장 경험에 AI가 붙으면 그건 곧 실행 능력이 된다.

경험의 매시업

가장 흥미로운 유형은 따로 있다. 물류도 해봤고 제조도 해봤고 영업도 해봤고 개발도 조금 아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전문성이 애매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AI 시대에는 반대가 될 수 있다. 제조에서 발견한 문제를 물류 방식으로 풀고, 물류에서 발견한 문제를 소프트웨어로 풀고, 그렇게 만든 걸 영업 경험으로 판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경험이 어느 순간 하나의 사업으로 합쳐진다. 이게 경험의 매시업이다.

앞으로 중요한 건 모든 걸 전문가 수준으로 아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농업 전문가가 프로그래머가 될 필요도 없고, 물류 전문가가 AI 연구자가 될 필요도 없다.

대신 자신의 경험을 AI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AI가 내놓은 결과가 현실에서 가능한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경험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AI로 빠르게 실험하고, 현실에서 검증하는 순서다.

AI가 실행을 맡을수록 사람에게는 무엇을 실행할지 결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그 결정의 재료가 경험이다.

경력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력을 직선으로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 분야를 고르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방식이다.

옴니휴먼의 경력은 직선이 아니다. 물류를 하다 개발을 할 수도 있고, 농사를 짓다 온라인 판매를 할 수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드론을 배우고 AI를 쓸 수도 있다. 관계없어 보였던 경험들이 AI라는 연결 도구를 만나면서 하나의 경쟁력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를 오래 하지 못했다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제를 많이 겪어봤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경험들을 연결할 수 있다면 그건 약점이 아니라 꽤 희소한 자산이다.

AI 시대의 경쟁은 어쩌면 AI를 가장 잘 쓰는 사람들만의 경쟁이 아닐 것이다. AI에게 줄 수 있는 경험과 맥락이 가장 많은 사람들의 경쟁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옴니휴먼의 시대다.

용어 쉽게 보기

글에 나온 용어를 개발자가 아닌 분도 읽을 수 있게 풀었다.

용어쉬운 설명
옴니휴먼여러 분야를 두루 겪어 본 사람을 이 글에서 부르는 이름. 옴니(omni)는 "모든"이라는 뜻.
생성형 AI글·그림·코드를 새로 만들어 내는 AI.
DOS윈도우 이전, 글자 명령으로 쓰던 PC 운영체제.
모뎀전화선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던 장치.
클라우드내 컴퓨터가 아니라 인터넷 너머 서버에 저장하고 실행하는 방식.
프로토타입아이디어를 확인하려고 빠르게 만든 시험용 결과물.
포워딩수출입 화물의 운송과 통관을 대신 처리해 주는 일.
검증 비용아이디어가 실제로 되는지 확인하는 데 드는 돈과 시간.
매시업서로 다른 것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 여기서는 서로 다른 경험을 엮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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